Showing posts with label 나의 수필.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나의 수필. Show all posts

March 11, 2015

내 외로움의 정체

미국 생활에 이골이 날 만큼 났음에도 불구하고 늘 외롭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작년에 드디어 내 외로움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엄마랑 난 무지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였다. 아들부자집의 유일무이 딸이다보니 엄마랑 난 모녀사이 이면서도 나이 터울이 좀 많이 나는 자매나 친구 같은 그런 느낌도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만큼 비밀이 없었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빼주어도 아깝지 않게 느꼈었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점은 일방통행이었고, 난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건 내 힘든 속을 털면 엄마는 내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프는 것보다 더 속상해 할 엄마에게 내 정신적인 육체적인 성장통 같은 것은 오히려 독이었을 것이기에 난 엄마에겐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힘든 것을 더 들키지 않을려고 조심했었다. 속내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나로선 무지 어렵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어서, 한 두어 번 학교 일로 속상함을 숨기지 못했다가  엄마를 힘들게 한 적이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나의 그런 행동은 엄마를 나의 고통으로부터 지킬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 아니어도 충분히 힘든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내 것까지 얹으면 안되었으니까. 좋은 것은 엄마랑 모두 나누지만, 나쁜 것은 나 혼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나만의 엄마 사랑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 번도 뭔가를 강요하신 적이 없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표를 정해준 것도 아니건만, 나는 늘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했고 그러고 싶어 했다.  엄마처럼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무조건 인내하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고, 엄마가 사시지 못했던 삶까지 살아야 했기에 그  책임감도 두 배였었다. 어린 내가 왜 그런 것을 감당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착한 딸들처럼 나도 철이 좀 많이 든 철분 과다 증후군을 앓고 있었던지, 아니면 그 시절의 '효' 교육의 모범생이었는지도.

그러다 어쩌다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서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엔  생활이 바쁘고 경제적으로도 시간도 빠듯해서 외로움 그런 것은 개나 주어버려라 였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길밖에 없어서 열심히 또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가 40을 훌쩍 넘겨버린 후부터 먼지 앉듯이 스멀 스멀 내 심장의 한 켠에 조용히 쌓여 오는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이 드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나이의 부작용 뭐 그런 것인가 생각 했었다.  이 주 저 주로 하두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오래 사귄 정든 친구들이 없어서 그러나 생각도 했었다. 마음을 틀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면 외로운 감정이 없어지려나 싶어서 친구들도 열심히 사귀어 보았다.  하지만 맘에 맞는 친구들이 생겨도 외로움은 감해지지도 않았고 그냥 내 속에 머물렀다. 그래서 어쩜 이런 감정은 내 삶의 존재와도 같은 것인데 젊었을 땐 사는 것에 쫒겨서 느끼지 못하다가 삶이 한가해지니 느껴지는 것인가 생각했다.  

작년 초에 엄마가 갑자기 아프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고, 8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엄마의 병이 죽음으로 가는 중대한 것임을 알게되었다. 모든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운명을 달리 하신 엄마는 이제 내게 그리움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젠 외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이 한 순간에 픽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젠 그 자리에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대신하고 있다.  내 외로움의 정체는 바로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었던 것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엄마랑 다른 하늘 밑에 살다보니 엄마의 살내음이, 정이 무지 그리웠었나보다. 그걸 외롭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보다.  이제 과녘을 잃어버린 화살처럼 이유를 몰랐던 고독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다.

늘 '난 딸이 있는데, 넌 딸이 없어서 어떡하냐' 란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엄마였는데, 이젠 내게 딸이 없음이 마음 아픈 것은 왠일일까? 염장지르는 말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없을 때의 딸을 걱정한 말이었음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딸이 하나면 곡도 못하던데...' 늘 하시던 염려처럼, 그리 해드리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가시는 길에 큰 소리로 울어주어야 제대로 보내주는 것었는데, 커다란 곡소리는 커녕 장례식에 맞춰 가지도 못했다. 건강하실 때 자주 나가서 뵐 것을...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자주 짬을 내지 못했을까.  이젠 후회해도 내 가슴을 쳐도 늦어버렸다. 끝까지 자랑스런 딸이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집착하고 있는 삶의 모든 것들이 이젠 고질병 같이 느껴진다.  

August 23, 2012

대학 간 아들

지난 토요일날 오후에 애가 대학 기숙사로 들어갔다.  
시원섭섭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먹먹함이 가슴을 메웠다.  
어찌나 먹먹한지 밥도 먹기가 힘들었고  
잠도 자기가 힘들었다.  
시원하게 눈물이라도 나오면 좋으려만  
슬프지는 않아서 그런지 
눈물은 나오지 않고 생각이 아들에게 머물때마다  
그저 눈시울만 뜨거울 뿐이었다.  
간난 애 때부터 이쁜짓 했던 것들이랑 
내가 화냈던 것들이 몽땅 다 생각나서 
후회랑 연민이 물밀듯이 몰려오기도 했다 
좀 더 사랑해주고 좀 더 많이 안아줄 것을…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노파심에 
따뜻한 말보단 혼냈던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아서 
가슴이 저며지게 아팠다.
사춘기 들면서 훌쭉 커버린 아들이 어려웠고,  
고집이 세서 나랑 입씨름도 많이 했는데… 
자기 없으면 엄마가 말싸움 할 상대가 없어서 많이 심심할거야’ 
하고 되려 나를 걱정하던 녀석이 이제는 다컸구나 싶어서 
또다시 내 눈시울만 후끈하게 했다.  
늘 입버릇처럼 하던 사랑해하는 말도 
이젠 내 눈시울을 달구는 말이 되었다.  
엄마가 시집가던 느꼈을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멀리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것도 아니고  
바로 앞의 대학에 보냈을 뿐인데 
이렇게 애를 떠나보내면서 
나도 애도 좀더 철이 들어 가나 보다.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장이 있다는데,  
우리 가족은 각기 새로운 장을 시작했다.  
이제 세상에 홀로 발을 디딘 애가  
씩씩하고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를 바래본다.   
이렇게 양육기를 끝내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우리 부부의 남은 생에도
보람이 가득하기를 바래본다.

January 25, 2011

수필: 어느 겨울 주말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난 주말 아침, 남편이 만들어준 커피 한 잔에 토스트로 아침을 해치웠다남편과 난 맞벌이 부부로, 내가 아프기라도 하는 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남편몫이기도 하다물론 기분 좋은 날 아침엔, 자진해서 아침을 준비해주는 자상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난 내 남편의 이런 조그만 자상함들을 고마워한다물론 해주고 뽐내면, 딴 남편들도 다 그러고 산다고 몰아부치기도 하지만어쩌면 진짜로 딴 남편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 우리가 그걸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아침식사 든든히 해서 배도 뽀땃하고, 기분도 좋아서, 오늘 날씨가 어떤가 싶어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 보니, 궂은 겨울비만 철철 내리고 있다주말에 날씨가 좋을거라고 그랬는데, 일기예보가 또 엇나가나보다. 에잉, 하루종일 텃밭에 나가서 일을 좀 해볼까 벼루고 있었는데, 비때문에 도루아미타불이 된 것 같다계획이 어긋나는 바람에, 할 일을 잃어버린 난, 빈둥빈둥 거실을 왔다 갔다, 신문 만화를 읽다가, 그것도 심심해서, 화분에 물을 주고 났는데도, 날씨때문에 뒤틀어진 기분이 안풀렸다. 그래서 CD들을 뒤적 뒤적 거리다가 한국에서 가져왔던 20년 된 송창식씨의 노래 CD 세 개를 찾아내서는, 오디오에 몽땅 걸어놓고 흥얼흥얼 따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젊었을 땐 난 송창식씨의 노래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다. 왜 좋아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든 지금은 무척 좋다가사들이 좋고, 음이 좋다세 개의 CD 속에 든 노래들을 몽땅 다 들어도 결코 지겹지 않게 느낄 정도로. 어쩌면, 내가 송창식씨의 노래를 좋아하게 된 다른 이유가, 그의 노래속엔 내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난 대학다닐 때, ‘우리는이라는 노래가사 속에서 처럼, 빛이 없는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했고, ‘내나라 내겨레를 따라 부르며,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우리가 간직함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나만의 작으마한 나라사랑, 민족사랑, 내 이상의 남성상, 뭐 그런 것들을 싫든 좋든 키워왔었나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난 요즘 노래 가사들을 그리 쉬 이해하기가 힘들다.  17살 난 아들이 다운로드해서 열심히 듣고 있는 노래들의 가사들을 듣노라면 더더욱 세대차이와 문화차이를 느낄 정도로 요즘 애들의 정서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송창식씨의 맨처음 고백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맨 처음 고백이 몹씨도 힘들어서 1 2년 그냥 흘려보내는 그런 정서를 이해하는 것을 보면, 내가 이제는 고물이 되어버린 대단히 오래된 고리적 사람인가벼 싶다
노래를 따라하면서, 흥이 오를대로 오른 난, 그것도 성에 안차서, 잠옷바람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 원래 타고난 몸치다. 그래서 내가 출 수 있는 춤이란, 그저 음에 몸을 맡기고,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리듯, 그렇게 흐느적 흐느적 음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내가 출 수 있는 춤의 다다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감히 춤을 추지 못한다. 안 추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워서 못 추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 집 거실에서 내 흥에 겨워서 춤을 춘다는데, 뭐 그런 것들이 대수이겠는가. 거기다가 송창식씨의 옛 노래들은 별루 빠른 템포가 없어서, 흐느적 스타일의 내 춤에 제격이기도 하다지나가던 아들이랑 남편도 한 번 씩 흘깃 쳐다보고는 그냥 간다어쩔 땐 혼자 흥에 겨워 주체를 못하는 나를 괜시리 건들여보고 싶은 남편이 세수나 했냐물어서 흥을 깨기도 하지만, 겨울비 내리는 어느 일요일 아침에, 노래속에, 춤 속에, 제 흥에 겨워, 옛시절의 먼 추억속에 빠져들어 홍야 홍야 거리는 나의 이 순간이 문득 행복이 아닐까 싶다그래서 혼자 속으로, 이런 행복은 바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Do it yourself 스타일의 작은 행복이니, 남편괜시리 행복해 하는 사람 무드 깨지 말고, 그냥 놔둬, 중얼거려본다.  

November 15, 2010

큰엄마가 그리워지네요.

우리 큰엄마는 19 나이에 큰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는데, 시절엔 19 새색시는 늙은 측에 속했다고 그런다. 생각엔 큰엄마는 힘이 좋으신 여장부가 아니었나 싶다. 시집오고 얼마 안있어서, 수확이 있었는데, 아무 생각이 없이 한가마니를 머리에 가볍게 이시고 동네길을 걸어서 집에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글만 읽으시는 큰아버지가 농사일에 관심이 없으셔서 혼자서 애태우시다가 그러신것 같다. 그런데, 다워야할 애띤 새색시가 이렇게 한가마를 버쩍 버쩍 머리에 지고 다닌 것이 동네분들 눈에 애사롭지 못하게 비쳤고, 이야기가 드디어 할머니 귀에까지 들어 갔는데, 할머니는 그것이 무척 맘에 드시지 않으셨나보다. 섬세하셨던 할머니에겐 힘이 것이랑 무식이랑 동격이라고 생각되셨거나, 새며느리가 집안 망신을 시켰다고 생각되셨었나보다.  할머니가 원래 좋은 것과 싫어하신 것에 대한 구분이 확실했고, 꽁하신데가 있으셔서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오래 갔는데, 큰엄마의 이런 인상들이 분을 고생스럽게 하시지 않았나 싶다.  거기다 큰엄마의 고된 시집살이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었던 것은, 몰락해가는 가운을 며느리가 잘못 들어 와서 그랬다는 이유 아닌 이유였다.

그에 비해 엄마는 엄마의 작은 동서이긴 하지만 나이 차이가 워낙 너무 많이 나고 막내 아들의 부인이다가 보니, 그리고 아빠가 일찌 감찌 직장을 잡아서 바로 옆동네로 이사를 바람에, 큰엄마가 밟았던 호된 시집살이의 전철을 용케 피하셨던 같다.  거기다가 엄마 또한 외가에서 나이 터울이 아주 심한 늦동이 막내딸로 자란 지라 큰엄마나 할머니가 애초에 일을 다부지게 것이라곤 기대조차 안하셨고, 아빠가 엄마편삭을 심하게 들어서 일을 시킬 생각조차도 못하셨던 같기도 하다.  그리고 순종적이 큰엄마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구박을 마디 없이 견뎌내셨지만 엄마는 할머니의 잔소리나 시집살이가 도가 지나치시다고 여기시면 가감히 할머니에게 따지시는 성격이셔서한마디로 시집살이 시키기가 힘드셨던 같기도 하다.  

큰엄마는 종손 며느리답게 일을 아주 하셨고, 크고 작은 경조사를 불평 한마디 없이 모두 치러냈다. 내가 어릴 때는 거의 제사가 있었던 같고, 치러야 명절도 많았다.  거기다가 어른들 생신들까지.  기억으론 고조할아버지 생신까지도 챙기셨던 같다.  큰엄마는 식구들 많은 우리집 생일 날들에도 오셔서 말없이 부엌 한켠에서 음식을 만드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큰엄마가 놀고 있는 것을 적이 없다. 많은 밭일에다가 도와 사람 하나 없는 집안 일들에 한시도 쉴새없이 이른 새볔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하셨다. 텔레비젼 보느라 낄낄 거리는 옆에서 바구니 가득 담긴 바느질거리에 쏟아지는 졸음에 꾸벅 꾸벅 조시면서도 일을 하셨다.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묵묵히 많은 일들과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 내실수 있는 도통 이해가 안되셨다고 그러셨다.  어린 내게도, 졸움을 참고 일을 하시는 곰스럽기만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되었으니.  그런데도 큰엄마는 불평을 들어줄 귀가 없어서인지 수가 워낙 없으셔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참는 것이 이럭이 나셨는지, 그야말로 불평같은 것을 줄도 모르셨다. 나도 우리에게 그렇게 잘해주시고 그리고 자상하셨던 할머니가 어떻게 큰엄마에게 그리 고된 시집살이를 시키셨는지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생각엔, 큰엄마 일복 많은 것도, 할머니의 시집살이도, 아버지의 무관심도, 모두 팔자라 생각하셨던 같고 대접받으실 조차도 기대하시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삶을 견디시며 사셨던 같다. 어쩌면 큰엄마의 친정집 교육이 이러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큰엄마가 친정집 이야기를 하시는 것도, 친정집 나들이를 하시거나 친정집 식구들이 집에 오는 조차도 적이 없다.   엄마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정도로 실천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큰엄마가 칠거지악을 포함한 사대 교육을 엄격하게 받으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말수가 적고, 힘들어도 불평할 모르고, 아파도 아프다고 표현하실 줄 몰랐던 엄마였지만, 아무도 그런 큰엄마를 이해해 수도, 도와줄 수도 없었다.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이해를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울 큰엄마는 모르셨던 것 같다.  엄마는 그런 엄마가 불쌍하시다고 그러셨고, 나역시 그런 고된 삶을 버텨내신 엄마가 그저 불쌍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우리집에선 이름하야 고명딸’, 걸쳐서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딸이였다. 하지만 명칭의 뒷면엔, 외로움이 짙게 깔려있는 빛좋은 개살구였다. 아들만 둘 가진 큰엄마는 딸이 없으셔서 그랬는지 나를 딸처럼 해주셨다.  어릴적엔 말수가 워낙 적었던 나는, 같이 말수가 없었던 큰엄마가 무척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큰집에 가면 큰엄마를 강아지처럼 졸졸 쫒아다녔다.  음식 만드시느라 아무리 정신이 없으셔도, 군불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는 나에게, 먹을 걸 챙겨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던 울 큰엄마. 고집부리다가 엄마에게 야단맞고 울고 있으면, 왜그랬냐고 내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시던 큰엄마. 등 긁어주시는 손끝이 너무 갈라져서 등 아프다고 쫑알되면 그냥 웃으시던 큰엄마. 잠이 안와서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면, 없는 말솜씨로 뭔가를 종알거려 날 잠재워 주시던 큰엄마.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해주셨는지 이젠 기억이 없다. 대학교 다닐려고 서울로 떠나던 날, 내 손을 꼭잡고 많이 보고 싶을 것이라고 눈물을 글썽이던 큰엄마. 난 가끔 내가 만든 나물들 속에서 큰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그 음식맛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큰엄마, 경희가 큰엄마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답니다. 눈감으면 아스라니 떠오르는 기억 저편의 제 고향 산천 속엔, 할머니도, 큰엄마도 있어요. 숱적은 머리를 단정히 빚어 쪽지시고, 거무틱틱한 치마저고리 입으시고 숙주나물 간을 보거나, 솥뚜껑 들어서 김오른 밥을 뒤적이시고, 막걸리 맛이 들었나 손가락으로 찍어드시다가 얼굴 빨개지시던 모습이 떠오를 적마다 큰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