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에 이골이 날 만큼 났음에도 불구하고 늘 외롭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작년에 드디어 내 외로움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엄마랑 난 무지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였다. 아들부자집의 유일무이 딸이다보니 엄마랑 난 모녀사이 이면서도 나이 터울이 좀 많이 나는 자매나 친구 같은 그런 느낌도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만큼 비밀이 없었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빼주어도 아깝지 않게 느꼈었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점은 일방통행이었고, 난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건 내 힘든 속을 털면 엄마는 내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프는 것보다 더 속상해 할 엄마에게 내 정신적인 육체적인 성장통 같은 것은 오히려 독이었을 것이기에 난 엄마에겐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힘든 것을 더 들키지 않을려고 조심했었다. 속내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나로선 무지 어렵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어서, 한 두어 번 학교 일로 속상함을 숨기지 못했다가 엄마를 힘들게 한 적이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나의 그런 행동은 엄마를 나의 고통으로부터 지킬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 아니어도 충분히 힘든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내 것까지 얹으면 안되었으니까. 좋은 것은 엄마랑 모두 나누지만, 나쁜 것은 나 혼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나만의 엄마 사랑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 번도 뭔가를 강요하신 적이 없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표를 정해준 것도 아니건만, 나는 늘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했고 그러고 싶어 했다. 엄마처럼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무조건 인내하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고, 엄마가 사시지 못했던 삶까지 살아야 했기에 그 책임감도 두 배였었다. 어린 내가 왜 그런 것을 감당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착한 딸들처럼 나도 철이 좀 많이 든 철분 과다 증후군을 앓고 있었던지, 아니면 그 시절의 '효' 교육의 모범생이었는지도.
그러다 어쩌다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서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엔 생활이 바쁘고 경제적으로도 시간도 빠듯해서 외로움 그런 것은 개나 주어버려라 였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길밖에 없어서 열심히 또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가 40을 훌쩍 넘겨버린 후부터 먼지 앉듯이 스멀 스멀 내 심장의 한 켠에 조용히 쌓여 오는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이 드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나이의 부작용 뭐 그런 것인가 생각 했었다. 이 주 저 주로 하두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오래 사귄 정든 친구들이 없어서 그러나 생각도 했었다. 마음을 틀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면 외로운 감정이 없어지려나 싶어서 친구들도 열심히 사귀어 보았다. 하지만 맘에 맞는 친구들이 생겨도 외로움은 감해지지도 않았고 그냥 내 속에 머물렀다. 그래서 어쩜 이런 감정은 내 삶의 존재와도 같은 것인데 젊었을 땐 사는 것에 쫒겨서 느끼지 못하다가 삶이 한가해지니 느껴지는 것인가 생각했다.
작년 초에 엄마가 갑자기 아프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고, 8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엄마의 병이 죽음으로 가는 중대한 것임을 알게되었다. 모든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운명을 달리 하신 엄마는 이제 내게 그리움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젠 외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이 한 순간에 픽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젠 그 자리에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대신하고 있다. 내 외로움의 정체는 바로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었던 것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엄마랑 다른 하늘 밑에 살다보니 엄마의 살내음이, 정이 무지 그리웠었나보다. 그걸 외롭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보다. 이제 과녘을 잃어버린 화살처럼 이유를 몰랐던 고독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다.
늘 '난 딸이 있는데, 넌 딸이 없어서 어떡하냐' 란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엄마였는데, 이젠 내게 딸이 없음이 마음 아픈 것은 왠일일까? 염장지르는 말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없을 때의 딸을 걱정한 말이었음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딸이 하나면 곡도 못하던데...' 늘 하시던 염려처럼, 그리 해드리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가시는 길에 큰 소리로 울어주어야 제대로 보내주는 것었는데, 커다란 곡소리는 커녕 장례식에 맞춰 가지도 못했다. 건강하실 때 자주 나가서 뵐 것을...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자주 짬을 내지 못했을까. 이젠 후회해도 내 가슴을 쳐도 늦어버렸다. 끝까지 자랑스런 딸이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집착하고 있는 삶의 모든 것들이 이젠 고질병 같이 느껴진다.
엄마랑 난 무지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였다. 아들부자집의 유일무이 딸이다보니 엄마랑 난 모녀사이 이면서도 나이 터울이 좀 많이 나는 자매나 친구 같은 그런 느낌도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만큼 비밀이 없었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빼주어도 아깝지 않게 느꼈었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점은 일방통행이었고, 난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건 내 힘든 속을 털면 엄마는 내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프는 것보다 더 속상해 할 엄마에게 내 정신적인 육체적인 성장통 같은 것은 오히려 독이었을 것이기에 난 엄마에겐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힘든 것을 더 들키지 않을려고 조심했었다. 속내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나로선 무지 어렵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어서, 한 두어 번 학교 일로 속상함을 숨기지 못했다가 엄마를 힘들게 한 적이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나의 그런 행동은 엄마를 나의 고통으로부터 지킬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 아니어도 충분히 힘든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내 것까지 얹으면 안되었으니까. 좋은 것은 엄마랑 모두 나누지만, 나쁜 것은 나 혼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나만의 엄마 사랑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 번도 뭔가를 강요하신 적이 없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표를 정해준 것도 아니건만, 나는 늘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했고 그러고 싶어 했다. 엄마처럼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무조건 인내하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고, 엄마가 사시지 못했던 삶까지 살아야 했기에 그 책임감도 두 배였었다. 어린 내가 왜 그런 것을 감당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착한 딸들처럼 나도 철이 좀 많이 든 철분 과다 증후군을 앓고 있었던지, 아니면 그 시절의 '효' 교육의 모범생이었는지도.
그러다 어쩌다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서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엔 생활이 바쁘고 경제적으로도 시간도 빠듯해서 외로움 그런 것은 개나 주어버려라 였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길밖에 없어서 열심히 또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가 40을 훌쩍 넘겨버린 후부터 먼지 앉듯이 스멀 스멀 내 심장의 한 켠에 조용히 쌓여 오는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이 드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나이의 부작용 뭐 그런 것인가 생각 했었다. 이 주 저 주로 하두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오래 사귄 정든 친구들이 없어서 그러나 생각도 했었다. 마음을 틀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면 외로운 감정이 없어지려나 싶어서 친구들도 열심히 사귀어 보았다. 하지만 맘에 맞는 친구들이 생겨도 외로움은 감해지지도 않았고 그냥 내 속에 머물렀다. 그래서 어쩜 이런 감정은 내 삶의 존재와도 같은 것인데 젊었을 땐 사는 것에 쫒겨서 느끼지 못하다가 삶이 한가해지니 느껴지는 것인가 생각했다.
작년 초에 엄마가 갑자기 아프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고, 8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엄마의 병이 죽음으로 가는 중대한 것임을 알게되었다. 모든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운명을 달리 하신 엄마는 이제 내게 그리움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젠 외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이 한 순간에 픽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젠 그 자리에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대신하고 있다. 내 외로움의 정체는 바로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었던 것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엄마랑 다른 하늘 밑에 살다보니 엄마의 살내음이, 정이 무지 그리웠었나보다. 그걸 외롭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보다. 이제 과녘을 잃어버린 화살처럼 이유를 몰랐던 고독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다.
늘 '난 딸이 있는데, 넌 딸이 없어서 어떡하냐' 란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엄마였는데, 이젠 내게 딸이 없음이 마음 아픈 것은 왠일일까? 염장지르는 말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없을 때의 딸을 걱정한 말이었음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딸이 하나면 곡도 못하던데...' 늘 하시던 염려처럼, 그리 해드리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가시는 길에 큰 소리로 울어주어야 제대로 보내주는 것었는데, 커다란 곡소리는 커녕 장례식에 맞춰 가지도 못했다. 건강하실 때 자주 나가서 뵐 것을...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자주 짬을 내지 못했을까. 이젠 후회해도 내 가슴을 쳐도 늦어버렸다. 끝까지 자랑스런 딸이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집착하고 있는 삶의 모든 것들이 이젠 고질병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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