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한국에 나갔을 때 오빠가 329곡의 노래를 담은 아이파드를 선물해 주었다. 하나 밖에 없는 이쁜 여동생 주고 싶다고 몇 달에 걸쳐서 모은 노래들이란다. 막상 받을 땐 경황이 없어서, 그리고 쑥스러움에,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요즘 들어와, 문득 일을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가든을 거닐다가, 집안 일들을 하다가, 아이파드에 담긴 오빠가 넣어준 노래들을 듣는데, 들을 때 마다 눈시울이 따끔거려 온다. 오빠가 나를 생각하면서 모아 준 노래들이라서 그런지 그 노래들 속엔 내 가슴을 뎁히는 오빠의 정이 같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이다.
난 4남 1녀, 둘 째로, 위로 4살 터울 나는 오빠랑 밑으로 남동생들이 세 명 있다. 어릴 때 부터 고집이 심하고, 지는 것을 싫어해서, 오빠고 동생이고 가리지 않고 잘 싸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의가 없지만, 장남 대접을 깍듯이 받는 오빠가 왜 그렇게 어린 마음에 얄미웠는지. 오빠말은 잘 들으면서, 둘 째인 내 말은 잘 안듣는 덩치 큰 남동생들이 못마땅했었다. 거기다가 욕심과 질투로 가득찬 어린 여동생이 부담스러웠는지, 오빠는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았다. 이런 어의없는 나의 반란이 나를 비롯한 그 모두에게 그저 이해받기 힘든 것이었다. 난 그게 속상해서 더 시비를 걸었고. 한마디로 하루도 바람잘 날 없이 만드는 나여서 그랬는지 어릴 때 부터 우리집 식구들은 나를 괴물 취급했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했다는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명의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는 가족 형편이 부담스러울 것을 걱정한 오빠는 군대를 가기로 작정을 했다. 어짜피 갈 군대니 갔다 와서 마음 먹고 대학 말년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랑 더불어서. 가족 떠나서 혼자 서울로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입대 전 날 정성스레 길렀던 머리를 쥐뜯어 먹듯이 빡빡 깎고 와서 어색한듯이 서있는 오빠를 보는 내 맘은 착잡한 그것을 떠나서 소리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추운 아침, 영장을 받은 오빠와 더불어 다른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기차역에서, 없어진 머리카락이 아쉬운듯이, 아니면 춥게 느껴서인지, 자꾸만 오빠의 손은 머리위에서 놀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쉬워서 우리 가족들은 다른 많은 가족들 처럼 할말도 잊고 그저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빠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할 말이 안떠오르시는지 자꾸 헛기침만 하셨고, 아빠보다 더 씩씩한 엄마는, 이럴 때 강건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각오하셨는지 오빠의 손을 꼭 잡고, 뜨거운 눈시울을 애써 참고 계시는 것 같았다. 군대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오빠는,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우리 일행에게, 이제 추운데 빨리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면서도, 이제껏 힘들게 숨기고 있던 눈물을 비춰보여, 바라보는 우리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는 그 모습에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고. 이미 들켜버린 눈물인지라 더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빠도 마냥 흐르는 눈물을 닦으시고, 기차가 저 멀리 떠나 간 후로도 우리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난 오빠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릴 적 오빠에게 못되게 군 내 행동들을 무척 후회했다. 그리고 오빠가 입대한 몇 일 후, 나도 대학 신입생이 되어서 서울로 떠나왔다. 오빠가 새파란 새 군인으로 거듭나듯이, 낯설고 춥기만 한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나도 새파란 대학 신입생으로의 힘든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오빠나 나 뿐만아니라, 부모님에게도, 갑자기 형과 누나를 동시에 잃어버리고 덩그렇게 남겨진 세 명의 남동생들에게도, 그 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게 느껴졌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 해의 초봄 어느 날, 과사무실의 내 편지함에 오빠가 군대에서 처음으로 보낸 하얀 편지가 꽂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힘든 병역생활과 가족애를 털어놓는 그 편지를 한 자 한 자 읽던 나는 애써서 참던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내용의 편지라도 받았나 오해하는 것 같은 주위 친구들의 우려섞인 눈짓에도 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나랑 맨날 싸우던 오빠가 보낸 글인가 싶을 정도로 그리움에 사무쳐 있었고, 나도 오빠가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4살아래 고집덩어리 여동생인 내게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한 것도 그랬고, 군대 가면 엄청 고생을 많이 한다더니, 정말 우리 오빠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해서였다. 나에게 있어서 오빠에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남매의 정은 아무리 치고 받고 싸운다고 없어지는 그저 그런 시시껄렁한 얇은 정이 아니라 가슴 저 밑에 간직 되어 있는 퍼내버릴 수 없는 묵직한 혈연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되었다. 그 후로 난 절대로 오빠랑 싸운 적도 없고 오빠를 무시할 언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오빠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장남으로 부모 다음으로 내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의 가정을 거느리고 바쁘게 살다보니, 그리고 이국만리 떨어져 있다보니, 서로 정감가는 이야기를 하게 될 일도 거의 없게 되었다. 남자형제들이라서 그려러니 아예 기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한 오빠가 ‘갱히 너, 보구 싶은데, 언제 한 번 한국 안나오냐’ 그러는 거다. 오빠는 아직도 옛적 할머니 마냥 내 이름을 이렇게 부른다. 어쨋든 이건 내가 꿈에서도 기대를 못한 그런 말이었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왜 생전 안하던 소리를 다 하고 그래… 어디 아파?’ 하는 내 물음에 오빠는 어색한듯이 전화 저 다른편에서 그저 껄껄 웃기만 하더니 ‘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한다. 그날 전화통화를 한 후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슴 한 쪽이 뭉클한 것이 어쩔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전화통화 이후부터 오빠는 한국에 나올 나를 기다리며 나에게 줄 노래들을 모았단다. 나이가 들면서, 서로 앞만 보고 사느라고 잊어버렸던 어릴 적 생각들을 하게 되고 그 먼 추억들 속에서 난 더이상 샘만 많던 선머슴아 같은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그리운 추억의 존재가 되어버렸나보다.
오빠, 나도 많이 보고 싶어. 막상 본다고 그리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가끔 보고 싶을 때 만나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좋을텐데. 그냥 같이 있다는 것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을텐데. 오빠가 이젠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봐. 그치 오빠? 혹시 이글 읽고 동생들이 삐질까 무섭네 하는 싶은 생각이 또 한편으로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게 누가 니들보고 억울하게 동생으로 태어나래? 오빠랑 내가 동생들에게 늘 하던 어릴 적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오빠의 그 첫 편지 이후로, 난 절대로 오빠의 여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해 적이 없다우.
Winter Carrot Sides
5 hours ago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입니다.
ReplyDelete나에게도 오빠가 있지요. 그리고 밑으로 여동생둘...
우리는 1남 3녀랍니다. 모두 이국만리 떨어져 살고있구요
어릴적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오래된 영화필름처럼 ....!!
지나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 추억들 뿐인것을....!!
다시 한자리에 모여서 오손도손 옛얘기를 밤을 새워가며 할수있는 그런 날이 올련지?? 알수없는 나의 앞날입니다.
미국 살면서 제일 힘들 때가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을 때입니다. 저만 혼자 딸랑 떨어져서 미국에 살거든요. 늘 제 빈자리가 난다고 그러는 가족들,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문득 떠오르면 밤잠을 설치게 되요.
ReplyDelete한국은 추석 이라는데... 님 글을 읽으니 늙으신 부모님, 언니, 오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또 납니다. 막내딸 한국 떠나던날 저희 아버지 눈물 흘리시는모습 처음 봤습니다. 오늘같은 명절날은 제가 손이 빨라서 송편, 만두를 빨리 잘 만든다고 좋아하셨던 엄마 생각도 많이 나고... 언니, 오빠는 음식만드는거 잘 도와주지도 않는데 두분이서 얼마나 힘드실지...
ReplyDelete나물사랑님, 추석이 오면, 가족 생각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아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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